형산강! 물 길 따라, 이야기 따라[17]-형산강 주변의 보물 (당간지주)이야기
경주신문 기자 / 1424호 입력 : 2020년 01월 23일(목)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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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삼랑사지 당간지주(보물 12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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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삼랑사터 당간지주(幢竿支柱) 이야기 경주 성건동 서천 강변도로가에 넓은 잔디밭이 있고, 그 안에 서로 닮은 돌기둥이 두 개 마주 보고 있다. 높이 3.7미터 쯤 되는 당간지주로 보물 제 127호이다.
그리고 이 일대는 신라시대 유명한 삼랑사(三郞寺)라는 절터라고 전해 온다.「당간」이란 절에서 불교행사를 할 때 부처나 보살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당이란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말하며, 이것을 세웠던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곳 보물은, 바깥 면에 무늬를 새겼고, 꼭대기에서 곡선을 그리며 둥글게 내려가다가, 전체 1/3정도에서 안쪽으로 굴곡을 이루며 깎여있다. 위. 아래 부분 두 곳에 구멍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켰다.
각 변의 길이,높이, 두께 등을 깍은 부분이 깨끗하고 간결하고 세련되어 장식 예술품처럼 돋보이는 뛰어난 석물(石物)이다. 원래 서로 5미터정도 떨어져 있던 것을 1977년에 지금과 같이 가까이 이동 시켜놓았다.
이 근처에 삼랑사란 절이 있었다고 하지만, 절에 관련된 부재들은 흔적이 없고, 이 당간지주만 남아있다. 지주 둘레에는 철제보호 울타리만 쳐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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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본 경주 삼랑사지 당간지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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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사(三郞寺)에 전해오는 이야기 이 절은 신라 진평왕19년(597)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삼국유사엔 명승「경흥」이 이 절에 있었다고 한다. 삼랑이라 함은 아마도 ‘3人의花郞’과 관계된 것으로 생각되나 관련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신라시대 이름 있는 사찰로 왕들의 출입이 잦았던 절이라고 전한다. 또한 관음보살이 환생하기도하고, 불교관련 이적이 나타난 신비스런 사찰로서, 특히 경흥국사와 이절에 얽힌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관음보살이 국사의 병을 치료해주다. 경흥국사는 일찍 불교에 통달하여 문무왕 때 신임을 받았고, 신문왕 즉위 때 부터 국사가 되어 삼랑사에 주거하였다. 어느 해 경흥국사가 병이 나서 한 달 간이나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 여승이 찾아와 ‘착한 벗이 병을 고쳐준다는 화엄경 구절을 소개하고,’스님 병은 즐겁게 웃으면 쾌유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 다음 11가지의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춤을 춰보였다. 과연 국사의 병은 어느 사이 나아버렸다. 국사가 여승이 떠날 때 사람을 시켜 추적해보니. 홀연 삼랑사 남쪽 남항사로 들어 가버린 후 자취를 감춰버렸고, 여승이 갖고 있던 지팡이만 절에 그려진 11면 관음보살상 앞에 있었다. 국사의 병을 고쳐준 이 여승은 11면 관음보살의 전신으로 국사에게 즐거움을 주기위해 우스쾅스런 짖을 한 관음보살이었다고 전한다.
▶문수보살이 경흥국사의 호사스러움에 충고를 하다. 경흥이 국사가 되고 신문왕의 신임을 받자 왕궁출입이 잦아졌다. 어느 날 경흥국사가 왕궁으로 가려고 시종이 행차준비를 하는 데, 말안장이며 꾸리개 등 말갖춤이 매우 화려했다. 또한 국사의 신발, 가사, 등 몸치장도 의젓해 국사의 나들이가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되고, 높은 신분의 귀인으로 알아 모두 길을 피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누더기를 걸친 몰골의 중 한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하마대 위에 앉아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등 뒤에 다 떨어진 광주리를 메고 있었다.
그 스님의 광주리 안에 마른 고기를 담겨 있는 것을 본 시중이 중더러, ‘중 옷을 입고는 어째서 이런 부정한 것을 갖고 다니느냐?’꾸짖는다.
중이 이르기를 “두 다리 사이에 산(生)고기를 끼고 다니는 것에 비하면 마른 고기를 갖고 다니는 게 더 낫지요”라고 대답한다.
국사가 대문을 나서면서 이 말을 듣고 뜨끔하여, 사람을 시켜 그이 뒤를 따르게 한다. 그 중은 남산 문수사에까지 가다가 광주리를 문밖에 내버리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지팡이는 문수보살상 앞에 있었고, 광주리속의 마른고기는 소나무 껍질이었다.
이 말을 들은 국사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문수보살께서 내가 말을 타며, 호의. 호식하는 것을 충고하시는 것이구나’후회하였고, 이후 국사는 절대 말을 타지 않았으며, 의·식·주 모두 검소하게 지냈다고 한다. 부처님이 경흥 국사를 내세워 사바세계 인들의 사치와 물욕에 대해 경종을 울린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이곳 (삼랑사터)에는 예부터 우물과 고목들이 있었으며, 조선시대 군영(軍營)이 있던 자리라고 전해온다.
-이종기 문화유산해설가·시민전문기자 leejongi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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