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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경주신문 기자 / 1429호입력 : 2020년 03월 05일(목)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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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試鍊) 지나친 피로(疲勞),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어느 질병에 관한 기록
↑↑ 손진은 시인
별을 노래했던 식민지의 한 청춘을 기억한다. 그는 “푸르다 못해 농회색으로 캄캄한”(「별똥 떨어진 데」) 밤하늘을 보며 나무에게 가야할 방향을 묻고, 별을 통해 자기 희생의 의지를 다졌던 순결한 영혼이다. 연못에 비친 달에 빠져 있는 자신이 미워 “무사(武士)의 마음으로 달을 쏘”(「달을 쏘다」)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병원'을 노래했다. 물론 육체적 질병으로 찾아간 병원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살구나무 그늘로 가려져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가슴을 앓는다는 여자’는 의 폐결핵이 아니라 암담한 시대적 현실에서 시대적 고뇌를 겪는 젊은이의 마음의 병이다. 더욱이 그녀가 있는 ‘병원 뒤뜰’은 외부와의 어떤 소통도 차단된 고립된 공간이다.

“나도 모를 아픔을” 혼자 견뎌보려 하다 화자도 병원이라는 곳에 들어 왔다. 그런데 의사는 나에게 병이 없다고 한다, 늙은 의사는 아픔을 알아주기는 커녕 젊은이의 병이 어떤 병인지 모른다. 기존의 제도와 관습에 안주하여 시대적 질병을 망각해버린 사람들, 이건 ‘나’에게 ‘지나친 試鍊’이요 ‘피로’다. ‘병원’은 자신이 병들어 있는 줄도 모르는, 환자들로 가득찬 이 세상을 뜻한다.

여자가 화단에서 금잔화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로 들어간다. 꽃은 어떤 자연물보다 생명력을 잘 표상한다. 이는 절망적인 현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는다는 상징적 의미가 들어 있다.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보는 화자의 행위도 동일한 의미이다.

윤동주의 ‘병원’은 토머스 브라운과 보들레르, 체호프와 릴케에 연결된다. 이들은 ‘세계가 병원이며 우리는 이해받지 못하는 환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 시는 시대적 질환을 앓고 있는 ‘나’의 치유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에도 의미가 있다. 바야흐로 온 나라가 전염병으로 들끓고 있다. 확진자를 격리시키고, 병상을 늘리고, 마스크를 구하기 위한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도 매일 보는 풍경이다. 사람 곁으로 가는 것조차 두려운 나날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 날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속단하기가 어렵다.

문제는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보다는 격리해야 할 사람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고, 불신하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질병이며, 그 질병이 만연할수록 이곳은 또 다른 의미의 ‘병원’이 되어버릴 것이다.

윤동주는 누구보다 ‘병원’이 되어버린 그 시대를 괴로워했다. 자선 시집의 이름을 ‘병원’으로 하려 했다가 「서시」를 쓰고 나서 그 시의 원제목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바꿀 정도였다. 오늘의 이 시대가 윤동주가 파악했던 그런 ‘병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우리에게도 분명 ‘봄’은 오고 “화원에 꽃이”(「화원에 꽃이 핀다」) 필 것이다.
경주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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