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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문화 이어주던 신문왕 호국행차길 ‘왕의 길’
골짜기마다 누천년 고금<古今> 이어오며 전설과 이야기 산더미처럼 쌓여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1437호입력 : 2020년 04월 30일(목)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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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4일, 벼르던 ‘왕의 길’을 걸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이어지던 길,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의 수중릉으로 행차하던 길, 신문왕 호국행차길로 알려진 길이었다.

후손들이 그 역사를 기억하며 ‘지금’을 관통하는 길이기도 했다. 왕의 행차 길이었으니 가파른 토함산길과 추령재를 피해 산세가 비교적 넓게 조성된 함월산 길을 왕의 행차길로 잡았을 것이다.

덕동호 동편 끝이 보이면 추령(楸嶺)이 시작된다. 함월산 자락 추령터널 입구 쪽으로 들어가면 왕의 길로 가는 진입로가 나 있다. 추령터널과 기림사를 잇는 왕의 길은 함월산 아랫자락을 잇는 편도 3.9km의 걷기 좋은 숲길이다. 왕복해도 8km 정도다.

이 날 함께 해 준 고마운 동행자는 감포에서 ‘아르볼(Arbol)’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사진가 최선호 씨였다. 왕의 길 초입인 모차골에서 시작해 수렛재, 불령봉표, 용연폭포, 기림사에 이르는 길을 걸었다. 우리는 왕의 길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고 산행을 시작했다. 모차골서부터 본격적인 왕의 길이 시작됐다. ‘3.9㎞ 용연폭포, 1.4㎞ 수렛재’ 라는 이정표가 바로 나타난다. 가는 길 내내 왕의 길의 스토리를 알 수 있도록 안내가 이어졌다.

 
↑↑ 동행해 준 최선호 사진가

우리는 편도를 걸으며 다섯시간을 이 산길에 머물렀다. 오솔길을 한참 걷다가는 문득문득 뒤를 돌아다본다. 완만한 곡선의 지나온 길은 무척이나 다정하다. 아직 널리 회자되지 않아 인적은 드물었고 이 길을 걷는 즐거움은 만시지탄이었다. 그래서 더욱 호젓했을까. 이 길에선 소나무 등의 침엽수종은 거의 보이지 않고 거의가 활엽수종이라 계절의 변화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4월의 숲길은 청량하기 이를데 없었고 간간이 부는 산바람은 명료하게 다가왔다.

걷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평평하고 다소 내리막길이 이어져 산행을 한다는 느낌보다는 흙길이 대부분인 오솔길을 걸으며 오래도록 산책을 하는 기분이었다. 길 가엔 낙엽들이 켜켜이 쌓여있었으나 신록들은 바야흐로 계절의 여왕으로 치닫고 있었다. 천연의 삼림욕은 덤이었다.

-모차골, 수렛재, 불령봉표, 용연폭포, 기림사에 이르는 ‘왕의 길’... 용이 왕이 되고 왕이 용이 되어 광명으로 나라 밝히던 길, 신라 사직 누천년 잇기위해 미래의 비전 모색하던 길
↑↑ 왕의 길 안내도.
그러니까 이 길은 ‘신문왕길’ 혹은 ‘신문왕 호국행차길’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왕의 길’로 불리고 있다. 이는 비단 신문왕 뿐만 아니라 여러 왕들이 동해로 행차하며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라는 추측에 따른 것이라 한다. 초입서부터 숲길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천연의 아름다움이 천진스레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두 사람이 지나기도 힘들만큼 오솔길이 대부분이었다. 어떻게 이 길에서 왕의 행차를 수행했을까. 그러나 길은 이따금씩 어차(御車)가 지날만큼의 폭 넓은 길로 변주되길 반복했다.

이 길은 신라의 시작부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감포와 경주, 장기와 경주를 이어주던 길이다. 사람과 문화를 이어주던 곳이지만 왜구가 침략하던 주된 통로기도 했다. 그래서 이 길에는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특히 이 길은 용성국의 왕자인 석탈해가 신라로 잠입하던 길이었고 신라왕궁 반월성에서 동해안 이견대까지 이르는 이 길은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장례행차길이기도 했다. 신문왕이 용이 되신 부왕(문무왕)을 추모하기 위해 대왕암으로 행차했던 길이었다. 또한 문무왕에게 신라의 보배인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기 위해 행차하던 길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길 곳곳에는 신라인의 충과 효의 이야기가 깃들어있는 길이다. 이 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왕과 용, 그리고 광명과 피리다.

용이 왕이 되고 왕이 용이 되어 광명으로 나라를 밝히던 길, 신라 사직을 누천년에 이어가기 위해 미래의 비전을 모색하던 길이 바로 이곳이다. 이 길에서 기원했을 호국의 꿈과 소망은 천년을 넘어 많은 흔적과 신비로운 이야기로 다가온다. 신문왕 호국행차길은 부강하고 평화로운 새 시대를 열고 아버지를 통해 강한 의지를 얻고자 했던 마음의 여정 길이었을 것이다.

↑↑ 불령봉표.

 걷다 보면 신문왕 길에 전해오는 지명에 대한 다양한 이정표를 만난다. 마차가 다니는 곳이라 해 마차골로 불리다가 모차골로 변했다는 ‘모차골’. 수레가 넘어 다녔다는 ‘수렛재’, 급한 경사에서 수레를 끌던 말들이 굴렀다는 ‘말구부리’, 신문왕이 긴 여정에 잠시 손을 씻으며 쉬어 갔다는 ‘세수방’,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한 ‘불령봉표’ 등 지명을 통해 옛 신문왕의 행차를 상상해본다.

이 뿐만 아니다. 수렛재를 한 참 지나 만난 ‘불령봉표석’의 발견은 신라인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람들로 이어지는 길임을 환기시킨다. 또 ‘숯가마터’에서 불과 50년 전만해도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로써 옛 사람들이 빈번히 오갔던 길이었음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금을 잇는 길인 것이다.

↑↑ ‘수렛재’에 다가가자 꽈배기 모양의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뺏는다.

-‘세수방’, ‘숯가마터’... 길과 숲에서 만나는 다양한 스토리는 끝없이 이어져

숲속에서의 4월의 하늘은 수시로 올려다보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나뭇가지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구상이거나 비구상 같았다. 모차골을 조금 지나서 계곡 옆 평지에서 최 작가가 직접 내려준 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누린다. 고금을 관통하는 숲에서 마시는 한 모금의 커피는 달디 달았다. 이 길과 숲에 대한 찬사와 다양한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숲에서는 독특한 향기를 머금은 생강나무, 누리장나무, 초피나무 등이 서식하고 있고 연분홍 연달래와 병꽃, 쇠물푸레나무꽃이 지천이었다. 특히 병꽃은 절정인 시기였다. 또 누대에 걸쳐 자연스레 자란 굴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당단풍나무 등 참나무와 단풍나무 종류를 유독 자주 만난다.


이 밖에도 산뽕나무, 작살나무, 덜꿩나무, 층층나무, 쪽동백나무 등이 줄을 잇는다. 짚신나물, 꽃며느리밥풀, 물봉선, 털진득찰, 노란제비꽃, 눈괴불주머니, 고마리, 이질풀 등의 초화류도 지천이었고 으름이나 칡, 청가시 등의 덩굴식물도 한창 그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모차골을 지나 한참을 가서 수렛재로 다가가자 마치 꽈배기 모양의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독특한 자태로 시선을 뺏는다. 수렛재를 지나자 갑자기 평평하게 너른 평지가 나타났다. 오솔길을 지나왔기에 이 너른 평지는 의외스러웠다. 이곳은 ‘숯가마터’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볼 수 있는 장소였다. 이곳은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알 순 없으나 숯을 구워내던 숯가마가 군데군데 보인다. 숯을 구워 생계를 잇던 사람들은 지금은 살고 있지 않지만 불과 50년 전만해도 이곳에는 숯을 굽던 연기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고 한다.

↑↑ 숯가마터

숯 굽는 연기가 사라진 것에 대해 주민들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간첩들이 대거 내려오자 간첩들에게 밥을 지어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곳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또 다른 평지가 보였고 곧 그곳이 ‘세수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세수방은 신문왕이 동해 해룡으로부터 옥대를 얻어 오다가 긴 여정에 잠시 쉬며 이곳에서 손을 씻던 곳이라고 한다. 세수방 마을의 이름은 ‘세수뱅이’라고도 한다.

절정기 병꽃들의 환호를 받으며 용연폭포로 더욱 다가갔다. 이어지는 계곡에는 적지 않은 물이 흘렀고 돌징검다리를 건너는 재미는 산행을 더욱 감질나게 했다. 가는 길 내내 이정표와 안내판이 있어 이 길을 쉬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주변 풍광을 해치지 않으면서 방문자를 배려하고자 설치한 최소한의 데크길과 안전장치는 적재적소에 있어서 이 산길과 조화로웠다.

↑↑ 용연폭포

-‘불령봉표석’, ‘용연폭포(龍淵瀑布)’... 고금 관통하는 길 위에서 만나는 즐거움

‘불령봉표석’의 발견은 신라인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사람들로 이어지는 길임을 다시 한번 환기시킨다. 조선 순조(제23대)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묘에 사용할 제수 경비를 마련하고자 썼던 문자 기록이 가로 1.2m, 세로 1.5m의 화강석 바위 표면에 새겨져 있다. 1831년(순조 31) 새긴 것으로 순조의 아들 익종을 모신 연경묘의 봉제사와 그에 따른 경비를 조달하는 산이니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는 용연폭포를 200m 남겨둔 지점에 마련된 쉼터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잠시후 대면할 용연폭포의 신비에 미리 들떠 자꾸만 섣부른 상상을 하면서.

길은 용연폭포에 이르러 절정을 맞는다. 이윽고 기대하고 상상했던 용연폭포는 1300여 년 전 신문왕의 행차를 떠오르게 하며 이 길의 정점으로 손색이 없었다. 하이라이트로서의 용연폭포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화룡점정격이라 할까.

이 폭포도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신문왕이 만파식적 대나무와 함께 얻은 또 하나의 보물 옥대(옥허리띠)의 용 장식 하나를 떼어 시냇물에 담그자 진짜 용이 돼 승천하고 시냇가는 길이 패여 이 폭포가 생겨났다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제법 많은 양의 폭포수는 숲의 정적을 깨우며 나른했던 내면까지도 각성시키는 듯하다. 과연 전설 속 폭포의 위용답다. 폭포의 경관을 잘 살펴볼 수 있도록 설치한 데크길에서 쉬이 떠나지 못하고 오래도록 폭포를 바라본다. 이 폭포에는 쏨뱅이목 둑중개과의 민물고기로 그 개체수가 날로 줄어들고 있는 한국고유종인 ‘둑중개’가 살고 있다. 용연폭포에서 800m 내려가면 고사찰 기림사를 만나게 된다. 기림사 넓은 경내를 지나 왕의 길 산행을 마무리 지었다.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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