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강 물길따라(23)-신라 김유신 장군 댁 우물(재매정·연보정) 이야기
이종기 시민 기자 / 1437호 입력 : 2020년 04월 30일(목)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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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재매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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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서라벌 집터와 재매정(財買井) 우물 경주 월정교를 지나 남천 강뚝(우측) 넓은 잔디밭에 김유신 장군의 집이 있었다고 전한다. ‘재매정비각’과 그안에 ‘신라태각 간 개국 공신 김선생 유허비’가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 당시 물 맛 좋기로 소문난 장군 댁 우물인 ‘재매정’이 이 있다. 장군의 집은 당시 서라벌에 있던 수십채의 고급 귀족 주택(금입택) 중 하나였다고 한다. 1991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주변지역(9000㎡)을 발굴조사하였는데 건물지, 배수로, 토기, 담장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재매정(사적 제246호)은 깊이가 약5.7m되며, 화강암으로 독안처럼 벽돌로 쌓아올렸고, 위에는 2단 정사각형의 장대석을 우물정(#)자 모양으로 얹어 놓았다. 우물 지름이 2m쯤 되며, 장대석 길이가 1.8m정도된다. 1872년(고종 9년)에 세운 유허비가 옆에 있다. ‘재매(財買)’가 김유신 장군 본가의 택호인 ‘재매정택’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아져, 김유신 장군 집안의 우물이란 뜻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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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재매정·비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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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물 맛은 옛날과 같구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645) 9월. 장군이 신라매리포성(지금의 거창)에서 백제군과 싸워 크게 이기고, 서라벌로 귀환 중, 다시 백제군이 쳐들어온다는 급보에 이를 격퇴하라는 어명 또한 떨어졌다. 군사 대열을 전쟁터로 돌려야했다.
가족이 기다리는 자기집을 먼발치에 두고, 그러나 그는 몇십보 정도 지나서 퍼뜩 자기집 우물 맛이 생각나 부하를 시켜 재매정물을 떠오게했다. “우리집 물 맛은 옛날과 같구나” 탄복하며 갈증을 달래고, 가족 상면을 마다하고 돌아선 자신의 심정을 달래면서 전장으로 말을 몰았다고 한다. 이곳 물은 멀리 함월산에서 내려오는 북천과 불교성지 남산골의 합수(合水)로, 당시 신라왕경, 반월성(궁궐), 귀족집 등의 식수원으로, 남천 저변을 통과하는 수질 좋은 신선한 물이었을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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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천 연보정(제공:진천구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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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생가터와 연보정(蓮寶井) 우물 ‘생거진천(生居鎭川)’이란 말이 있다. ‘진천’은 우리나라에서 사람 살기 좋은 고장으로 알려져있다. 예부터 물이 좋고 많으며, 넓은 평야에 토지가 비옥하고, 특히 인심이 후한 고장이다. 이번 코로나19사태에도 중국 후안교민의 진천 수용 환영과 마스크 지원 등에 적극적이었다. 김유신 장군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 진천이다.
충북 진천군 진천면 상계리(계양마을)로 국가사적 414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곳에 그의 생가터, 태실, 식수터(연보정), 장군 유허비 등이 있다.
장군이 태어난 집터를 ‘담안밭’이라고 한다. 아버지(김서현 공)와 어머니(만명부인) 형제 등이 살았던 집인데, 서라벌로 이사 후 집이 무너진 뒤 동네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사방이 담으로 둘러친 태수의 사택을 ‘담안’이라 하고 건물이 무너진 뒤 집터가 곡식을 심는 밭으로 변하면서 ‘담안 밭’으로 불렀다고 한다. 지금 생가터엔 1983년 건축된 기와집 한 채가 생가터를 대표하고 있다.
▶장군집 우물 ‘연보정’과 사랑 이야기 연보정은 장군 아버지 김서현 공이 신라 만노군(지금의 진천군)의 태수로 있을 때 집 우물이라고 한다. 장군의 어릴 때 젖줄·생명수이요, 유년기의 활력수이다. 이 우물은 생돌(자연석)을 이용 둥글게 쌓았으며 직경 1.8m, 최고높이 ~2.6m정도 된다. 우물 입구쪽에서 바닥으로 오르내릴 수 있도록 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4m정도의 수로가 있어, 물이 흐르고, 엎드려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특이한 것은, 우물 위에서 내려다 보면 물고인 밑바닥이 묘하게도 ‘♡(사랑의 표시)’ 모양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요새 사람들은 전해오는 장군 부모의 혼전 사랑 얘기를 끄집어내어 이를 포장하고 있다.
△김서현 공과 만명부인의 사랑 두 사람은 연애를 했지만 양가의 반대가 극심했다. 김서현 공(멸망금관가야왕손)과 만명부인(신라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의 딸)간의 신분상 문제가 절대 장벽이었다. 그러나 김서현 공이 만노군 태수로 발령을 받아 진천(鎭川)으로 떠날 때 여자는 남자를 따라 몰래 함께 떠났고, 하는 수 없이 양가에서 이를 인정, 혼인시켰다고한다. 당시 가문의 반대는 물론, 서라벌의 충격적인 연예사건이었을텐데도 둘은 결혼으로 골인하였으니, 이 샘을 그들 사랑의 증표라해도 멋있고, 그럴듯하게 들린다. 항시 물이 마르지 않고 맛도 좋다고 한다. 200m 위에 있는 태령산에서 지하수가 흐르고, 연보정 아래 연못에까지도 물이 이어진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의 생애는 두 지역의 좋은 물로 이어졌다. 연보정(진천)물과 재매정(경주)물이다. 전자는 성장기에 무인으로서의 성격과 골격형성에 기초 에너지가 되었고, 후자는 국가충성시기에 무장, 대장군으로 그리고 삼국통일 대업의 선봉장으로서, 노련한 심신의 원숙한 활력수였다고 볼 수 있다. ‘물 좋은 곳에 인걸이 난다’고 했다. ‘땅의 성질에 따라 식물의 열매가 달라지듯이 사람 또한 좋은 물이 있는 곳이면 심신의 크기가 달라져 걸출한 위인이 생긴다’는 말일 것이다. 신라의 대장군, 김유신 장군의 경우에 딱 적합한 말인 것 같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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