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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이 돌아가셨다
경주신문 기자 / 1442호입력 : 2020년 06월 04일(목)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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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이 돌아가셨다


                                                       정병근


텔레비전이 꺼졌다
화면이 부르르 떨리더니 몇 번 번쩍거리다가
한 점으로 작아지면서 소멸했다
별빛이 사라지듯 이생의 빛을 거두었다
적색거성처럼 화면은 며칠 전부터 불그스름했다
옆구리와 가슴을 쿵쿵 치고 몸을 움직여 보았지만
텔레비전은 한 번 감은 눈을 더는 뜨지 않았다
플러그를 뽑았다가 다시 켜도 허사였다
오래 준비해 온 듯 텔레비전은 단호하고 고요했다
결혼하면서부터 함께했으니 근 25년,
나는 그렇게 텔레비전을 임종했다
집안의 큰 어른이 돌아가신 듯 마음이 허망했다
무릎을 세우고 텔레비전을 보던 고향 집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 무슨 말끝이었나
그때 나는 아버지와 텔레비전을 겹친 시 한 편을 썼었다
갑작스런 고요가 귀에 맴돌아 나는 방 안을 서성거렸다
아내에게 알릴까…… 바쁘다고 짜증내겠지
처사께서 졸卒하셨다고 부고를 띄울까…… 다들 웃겠지
텔레비전은 우리 집의 어른이었다
거실의 제일 상석에 앉아 세상의 영욕을 비추며
가뭇없는 우리의 눈을 지그시 모아주었다
평평한 당구대의 알레고리를 간직한 채 평면으로 돌아가셨다
어떤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텔레비전의 주검을 방치한 채 몇 달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휴대폰의 작은 화면으로 뿔뿔이 눈을 돌렸다
밥상은 고요했고 집 안은 푹 꺼진 동굴처럼 어둑했다
나는 아내가 텔레비전을 들이자고 할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다
아내도 나 같은 생각을 하는지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느 어른의 죽음, 그 이후
↑↑ 손진은 시인
정병근의 새 시집 『눈과 도끼』에 눈길이 오래 갔다. 중년에 이른 자신의 자화상 「나를 만났다」, 「보인다」같은 작품을 읽을 땐 애잔했다. 사무치는 이생을 개괄한 「아내가 운다」와 이 시에 대한 응답으로 쓰여진 「램프의 사내」를 읽으며 그의 부부가 떠올랐다. “광주리에 뙤약볕을 이고” 간(「엄마는 간다」), “한번도 고등어를 제대로 먹지 않”은 어머니(「고등어는 나의 것」 )를 읽으면 가계가 느껴진다. 전철역 출구 앞에서 “천지에 나 닮은 이, 수심에 가득 찬” 형님을 만나 “비탈방에 기거하며 경비 일 하는 사연을 들어보련다” 하는 「형님을 데리고」도 곡진하긴 마찬가지였다.

「텔레비전이 돌아가셨다」를 읽으며 웃다가 슬퍼지다가 다시 심각해지기를 여러 번 했다. 쉽고도 잔잔하고도 여운이 오래 남는 시다. 시의 도입부를 읽으면 참 우스꽝스럽다. 화면이 떨리다가 꺼지는 장면을 “별빛이 사라지듯 이생을 거두었다”로 표현한 것도, 칼라가 분별되지 않는 상태를 적색거성으로 잡은 것도 그렇다. 그러나 “오래 준비해 온 듯 텔레비전은 단호하고 고요했다”에 이르면 텔레비전은 참 어른의 풍모마저 풍긴다. 그 어른이 사라지고 나니 집안은 “갑작스런 고요”로 인한 적막강산이다. 이 불길한 슬픔이라니!

이 시의 내밀한 부분은 “지그시”와 “뿔뿔이”라는 두 부사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지그시”는 ‘모아’라는 말을 당기고, “뿔뿔이”는 ‘돌린다’라는 말을 당긴다. 그렇다. 텔레비전은 “세상의 영욕을 비추며/가뭇없는 우리의 눈을 지그시 모아주었”는데, 휴대폰은 “작은 화면으로 뿔뿔이 눈을 돌”리게 하는구나. 그래서 “집 안은 푹 꺼진 동굴처럼 어둑”해지는구나.

가정에까지 들어와 가족마저 각자의 섬에 빠지게 하는 문명의 이기를 고장난 텔레비전을 통해 떠올리게 하는 시다.
경주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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