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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컵
경주신문 기자 / 1448호입력 : 2020년 07월 16일(목)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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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컵


                                      정희경


90℃ 커피가 자꾸 화를 돋우더니
서서히 식고 있다 온몸이 축축하다
늦도록 불 밝힌 사무실 만년 대리 책상 위

새벽을 들이켜는 손가락이 희고 길다
복사기의 거친 숨결 보고서를 씹고 있다
한순간 사정없이 구겨져 던져지는 24시

간벌한 숲 사이로 울리는 브라보 소리
두 손으로 감싸는 체온은 남았는데
찰나가 지나간 거리 칼바람에 밟힌다



-종이컵이 들려주는 인간, 환경생태 이야기
↑↑ 손진은 시인
대량소비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자연은 우리가 힘들거나 괴로울 때 도피처로 삼는 세계쯤으로 인식된다. 오늘날 인간은 얼마나 부지불식간에 숲을 없애고 나무를 베고 있는가? ‘종이컵’을 시적 화자로 내세우는 위의 시는 그 양상을 시적 긴장감과 극적 효과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시 쓰기는 사람의 눈이 아니라 종이의 몸과 배(첫째 수), 종이의 눈(둘째 수), 나무의 입과 귀, 몸(셋째 수)이 되어 절실하고 적극적인 입장으로 수행된다. 여기서 시인은 나무가 되고 종이가 되어, 베어지고 찢어지고 밟히는 과정 중의 주체로 기능한다. 숲의 나무가 베어져, 종이컵이 되어 커피를 담고, 구겨져 던져지고, 다시 거리에 버려져 밟히는 과정은 그대로 생명성이 찢겨나가는 시간이다.

첫째 수에서 컵은 뜨거운 커피에 화가 나고, “서서히 식”으며 “온몸이 축축”해진 상태로 “늦도록 불 밝힌 사무실 만년 대리 위”에 있다. 이 창백한 대리는 자본주의에 소모되는, 고골의 소설「외투」에 나오는 아까끼 아까끼예비치 같은 인간이다.

둘째 수에서 종이컵은 자신의 몸에 담긴 새벽(커피)를 마시는 만년 대리의 희고 긴 손가락을, 연이어 자신과 같은 입장에 있는 복사기 속 씹혀지는 보고서를 보다가, 사정없이 구겨져 던져지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피로가 극점을 이루는 24시, 자정의 시간이다.

셋째 수는 입체적인 묘사가 시간성과 공간성을 내장함으로써 현장감이 배가된다. 종이컵이 나무였던 전생을 떠올리는 초장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곳은 나무와 새와 짐승과 흙과 공기가 하나의 울림으로 공존하는, 모든 것이 푸르러지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생명성이 빛을 발하는 숲의 시간이다. 구성을 살펴보면 자연 속 생명의 첨예한 촉수로 존재하던 시간(초장), 만년 대리의 체온이 남겨진 종이컵의 시간(중장), 마침내 칼바람에 밟히는 버려진 시간(종장) 등 전생과 후생의 이질적인 시간이 중첩되어 나타나면서 극적인 양상을 띤다.

시인이 억압당하는 생명의 눈으로 이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고 찢기는 생명의 언어로 이 세계를 그리는 것은 자연에서 생명의 촉수를 발견하도록 독자에게 성찰과 결단의 힘을 부여하기 위해서다.

곧 휴가시즌이다. 사람들이 머물다 간 자리마다 일회용품이 쌓이고, 산과 바다는 오염되며 몸살을 앓을 것이다. 그것은 부메랑으로 언젠가 우리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결코 자연보다 우월한 존재도, 자연 밖의 존재도 아니다. 잊지 말자. 자연은 내가 뿌리를 박고 있으면서 나와 같이 호흡하고 숨쉬는 전체, 내 어머니요 근원적 고향이라는 것을.
경주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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