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를 드리러
백무산
시골 장거리에 예배를 드리러 가야겠다 일용할 양식들이 흙 묻은 발을 막 털고 나온 곳 목숨의 세세한 물목들이 가까스로 열거된 곳
졸음의 무게가 더 많이 담긴 무더기들 더 잘게 나눌 수 없는 말년의 눈금들 더 작게 쪼갤 수 없는 목숨의 원소들 부스러기 땅에서 간신히 건져올린 노동들 변두리 불구를 추슬러온 퇴출된 노동들 붉은 내장들 엎질러져 있고 비늘이 벗겨지고 벌건 핏물에 담긴 머리통들이 뒹구는 곳 낡은 궤짝 제단 위에 염장을 뒤집어쓰고 누운 곳
보자기만한 자릿세에 졸음의 시간들이 거래되는 곳 최소 단위 혹은 마이너스 눈금이 저울질되는 곳 저승길 길목 노잣돈이 욕설로 에누리되는 곳 시간이 덕지덕지 각질 입은 동작들 추려서 아이들 입에 한술이라도 더 넣어주고 가고 싶은 애간장이 흥정되는 곳
세상에서 가장 선한 예배당에 까무룩 햇살 속으로 사라지는 계단을 밟고 예배를 드리러 가야겠다
-시장, 세상에서 가장 선한 예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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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진은 시인 |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예배 장소는 어느 곳일까? 물론 부처님이나 예수님이 계시는 곳일 거다. 그러나 부처님과 예수님이 현실에 나타나실 때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분들에게서 절대자를 보지 못하면 애써 쌓은 종교도 계율도 다 부질 없는 일이 된다.
“시골 장거리에 예배를 드리러 가야겠다”고 시인이 말했을 때 시인은 거룩이 저잣거리에 있음을 짚어내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는 일용할 양식이며 목숨의 세세한 물목들도 인간과 똑같은 대접받는다.
시인은 특히 “변두리 불구를 추슬러온 퇴출된 노동들”인 노인들에게 시선을 보낸다. 장거리 예배당의 “낡은 궤짝 제단”에는 흙묻은 발을 털고나온 채소와 이런저런 물품들, 짐승의 붉은 내장들이나 염장을 뒤집어쓴 해산물들이 놓인다. 그런데 그 제물들앞에 앉은, “더 잘게 나눌 수 없는 말년의 눈금들”인 그분들은 보자기만한 자릿세에 졸음의 시간을 거래하고 계신다.
그곳은 저승 갈 노잣돈이 욕설 한 마디에 에누리되고, 덕지덕지 각질 입은 손마디로 손주들 입에 한술이라도 넣어주고 가고픈 애간장이 흥정되기도 한다. 저세상으로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구들의 후손을 생각하는 동작들이 추려지는 곳이 어찌 “세상에서 가장 선한 예배당”이 아니겠는가. 이런 예배당에는 구태여 밟고 올라가야 하는 계단은 필요하지도 않겠지. 시인의 예배당은 종교적 형식을 넘어선 곳에 있으니.
도시적, 윤리적 감수성으로 포장되지 않은 웅숭깊은 정신이 건져낸 시에서, 삶의 끝자리에 있는 눈그늘을 허투루 보지 않겠다는 시인의 의지를 읽는다. 가장자리에 도달한 늘그막의 인간들, 그리고 시장의 품목들이 예배 이미지로 새로운 옷을 지어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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