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곡동 무명산 아래에 살며 부귀영화를 멀리한 선비들
경주신문 기자 / 1430호 입력 : 2020년 03월 12일(목)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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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 경주 보문단지에서 감포방향으로 덕동댐을 지나면 댐 좌측안쪽으로 암곡마을이 자리한다. 치암(痴庵) 남경희(南景羲,1748~1812)는 「명곡동안기(明谷洞案記)」에서 “갑자년(1804) 여름 6월 3일, 명곡동 동안(洞案)이 만들어졌고, 앞서 영양남씨·경주최씨 두 성씨가 먼저 거주하였다.”라며, 1700년 후반에 명실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언급하였다. 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기 이전에는 황룡골·명실골·기와골 물줄기가 모이는 덕동마을을 비롯해 가가호호 부락을 이뤘다. 그 가운데 치암은 44세 1791년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암곡에 다섯 칸 집을 지었고, 10년 후 1801년에 지연정사(止淵精舍)라 하였다. 지연정사에서 서쪽으로 구릉을 넘으면, 최씨·박씨·고씨가 모여사는 손곡마을이 나오는데, 치암은 손곡동 자희옹 최치덕 등과 교유하며 전원생활을 즐겼다.
암곡동의 조선문화는 댐 건설과 시민들의 무관심으로 잊혀져 가고 있다. 현재 덕동댐 둘레길을 따라가다 보면 암곡동 서산류씨 집성촌 대성마을을 지나 지연정사가 보이고, 와동구판장에서 우측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면 서산류씨 묘역이 나온다. 북에서 남으로 덕동댐을 빙 둘러 한참을 가다보면 최신남을 모신 추봉정사(秋峰精舍)와 명실마을에 자리한 경주이씨 용옥골 주인 만향정(晩香亭)이 있다. 이렇듯 덕동마을은 조선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수많은 원사정재를 간직하고 있으며, 댐 관리실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수몰된 덕동마을을 추억하기 위해 2012년에 세워진 망향정이 지난 역사를 품고 아래를 굽어본다.
어느 날 치암은 이름 없는 산 아래에 사는 경주최씨 선비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고, 파직되어 고향으로 온 자신의 처지와 아예 벼슬에는 마음이 없는 그의 얘기에 공감을 나눈다. 선비는 사는 처지가 궁핍하지만 의를 잃지 않는 곧은 지조를 지녔고, 치암은 그에 걸맞은 당호(堂號)를 생각하지만 이내 떠오르지 않는다.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행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선비의 일이고, 이름 없는 정자가 아닌 명성(명예)에 마음을 두지 않는 무명정(無名亭)의 탄생이 다음과 같았으니, 치암의 풀이가 더욱 의미깊다.
-무명정기(無名亭記) 암곡에 무명산(無名山)이 있는데 처사 최 공이 사는 곳이다. 공의 집은 그 아래에 있었고, 골짜기 이름으로 집의 이름을 삼았다. 나에게 방에 붙이는 당(堂)의 이름을 묻기에, 나는 캄캄한 방에 머무는 그를 위해 불기헌(不欺軒)이라 답하였다. 이에 공은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붓을 구해 새겨서 걸고자 하였고, 얼마 뒤 나에게 “불기(不欺)라는 이름은 나의 덕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실체는 없고 그 이름만 있으니, 속임[欺]이 무엇보다 심해서, 바꾸는 것이 좋겠다.”라 하였다. 나는 그를 위해 당호(堂號)를 여러번 고쳤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얼마 뒤 또 나에게 “결정하였다. 지난번 내가 사는 산의 이름을 명한 것이 좋겠다.”라 하였다. 나는 “무명(無名)이라 한 것은 산을 말한 것이니, 정자는 무명 이름을 쓸 수가 없겠습니까?”라 하니, “그렇지않다, 무명이라 하는 것 역시 이름이다. 이름을 어찌 피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내가[최 공] 명예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 궁하고 어두운 곳에서 스스로를 해하고, 정자에 의탁해 마음을 머문 것일 뿐이다.”라 하였다. 나는 “아닙니다. 공께서 비록 처지가 궁하지만, 항상 의를 잃지 않고 사우(士友)에게 칭송을 받았고, 없는 것이라곤 세속의 조정에서 다툰 것이니, 외물의 있고 없음이 어찌 족히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무릇 이름[명분]이 천하에 귀해진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죽어서 칭송이 없는 것을 성인께서 일찍이 괴로워하였기 때문에 효자는 부모를 드러냄에 드날리고, 열사는 몸 바쳐서 순국합니다. 중하기가 그와 같은 자가 어찌 외물에서 뜻을 두겠습니까? 오직 외물에서 뜻을 두고 무릅쓰는 자 대부분은 쥐를 보옥으로 여기고, 닭을 봉황으로 여기고, 철화로 위를 걸으며 천하를 속일만하니, 어찌 이에 격분하고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고자 합니까? 그 실체가 있는 자는 명성이 따르고, 명성을 피하면서 아울러 실체를 피하고자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라 하였다.
나는 공을 위해 풀이를 청하였다. 무명은 이름[명성]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명성에 일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명성에 일이 없고, 일삼는 것이 그곳에 있다면 만물은 모두 나에게 갖추어질 것입니다. 크게 말하자면 부모에게 효도함은 나에게 달려있고, 효자라 말합니다. 임금에게 충성함은 나에게 달려있고, 충신이라 말합니다. 형제 간에 우애 있고, 붕우 간에 신뢰함은 모두 우리의 일이고 우애와 신뢰하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타인에게 달려있는 것은 내가 허여할 것이 없고, 오직 나의 일에 힘쓴다면 지난번 이른바 속이지 않는 경우가 그 가운데 있어서 어두운 방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명은 큰 쓰임이 있으니, 정자의 이름으로 어찌 쓸 수가 없겠습니까? 이를 공에게 말하니, 공은 기문을 써 줄 것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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