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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장판
경주신문 기자 / 1433호입력 : 2020년 04월 02일(목)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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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장판


                                                      박소란



전기장판에 누워 겨울을 난다
어떤 추위에도 끄덕하지 않는다 부연 입김이 터져 나오는 꿈이라도
따뜻하다 이 방은 참 따뜻한 곳이라 알 수 있다

아버지도 나도
전기장판에 누워 겨울을 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따뜻하다 따로 또 같이
믿을 수 있다

종일 떨다 돌아온 날에는 온도조절기에 빨갛게 불이 들어온 것만으로 안심이 된다.
세상 끝 옥탑에 보일러가 도는 기분

외출할 땐 꼭 끄고 나가셔야 해요 꼭이오 당부할 때마다 아버지는
알았다 좀처럼 대답하지 않고

피를 마르게 한다는데
온수매트를 사야 하나 얼마짜리를 사야 하나 이따금 고민도 하지만

지금은 버릴 수 없다 취한 바람이 창을 때리는 초저녁
금빛 장판 위에 쓰러지듯 누운 아버지는 어느덧 새근새근 잠이 들고

피를 마르게 한다는데

일부러 장판을 켜지 않은 날에는

무거운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덮게 된다 죽은 척

짓궂은 장난을 치는 아이들처럼

아버지도 나도

전기장판에 누워 겨울을 난다
어떤 슬픔에도 끄떡하지 않는다



-전기장판 한 장의 위력
↑↑ 손진은 시인
“기껏 ‘전기장판’ 하나가?”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아랫목 절절 끓는 마을 회관에서 돌아와 냉골의 방에 보일러 기름값 아끼려 그 얇은 장판 위에 누운 할머니가 떠오른다. 가난한 장삼이사의 자취방과 셋방에서 겨울을 나는 데 이만한 것이 또 있으랴.

“세상 끝 옥탑”의 한 방에서 불편하게 생활해야 하는 부녀에게 전기장판은 그들의 모든 것이다. 그러기에 “어떤 추위에도 끄떡하지 않”을 수 있고, 꿈에도 부연 입김이 터져나오는 냉골에서마저 “방은 참 따뜻하다”고 알 수도, “따로 또 같이”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종일 떨다 돌아온 날엔 “온도조절기에 빨갛게 불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보일러가 도는 기분”이 들 정도로 안심이 된다. “외출할 땐 꼭 끄고 나가셔야 해요 꼭이오” 당부해도, 아버진 “알았다 대답하지 않”는 집착을 보인다. 여기엔 “피를 마르게 한다는” 건강상식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온수매트를 사”려고 고민하지만 “지금은 버릴 수 없”을 정도로 멀쩡하기 때문이다. 지쳐 돌아온 아버지가 태아적 모습으로 “새근새근 잠이 들고”, 일부러 장판을 켜지 않은 날 부녀가 “무거운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덮”은 채 “죽은 척 짓궂은” 유희를 벌이는 것도 금빛 장판 위에서의 일이다. 놀라워라. 화자는 전기장판에 누워 겨울을 나는 일을 “어떤 슬픔에도 끄떡하지 않는” 일이라 한다. 전기장판은 추위만 막아주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생각과 감정의 모든 것을 데워주고 있었구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난에 대한 시적 화자의 태도가 적대적이거나 비판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정이나 체제비판적인 시가 도달하지 못한 단계를 성취한 것은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은 전기장판을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주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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