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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충신 김진양 동해안 이견대·대왕암을 둘러보다
경주신문 기자 / 1437호입력 : 2020년 04월 30일(목)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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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경주출신 초려(草廬) 김진양(金震陽,?~1392)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 가운데 한 명으로, 이성계세력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21권,「경상도·경주부」에 “김진양은 고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10년이 못 되어 중요한 벼슬을 역임하고,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조준(趙浚) 등의 죄를 논핵(論覈)하였더니 대간(臺諫)들이 번갈아 소(疎)를 올려, 김진양의 무리가 일을 만들어 내어 화란(禍亂)에 이르게 한다며, 곤장을 맞고 먼 지방으로 귀양 가서 죽었다. 호(號)는 초옥자(草屋子),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7~1392)이 전(傳)을 지었다”기록한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곧은 기개와 박식한 학문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김진양은 조선이 개국하면서 그의 명성은 잊혀 갔다. 고려 말 이성계의 측근인 정도전ㆍ조준ㆍ남은ㆍ남재ㆍ윤소종ㆍ조박 등을 먼저 축출하고자 정몽주가 김진양을 시켜 공양왕에게 상서[上恭讓王書]를 올렸으나, 정몽주가 살해당하면서 이성계 축출은 수포로 돌아간다. 이후 국문(鞫問)을 받자 정몽주 외에 우현보·이색 등이 지시했음을 실토하고, 장 1백을 맞고 먼 지방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고. 도은 역시 정도전의 심복에 의해 유배지에서 살해당한다. 만약 고려의 국운이 계속되고, 정몽주가 살해당하지 않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곧은 그의 절개는 후대의 귀감이 되어 마땅하고, 당론을 떠나 의를 지킨 인물로 경주에서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도은이 지은 「초옥자전(草屋子傳)」은 『도은집』과 『동문선(東文選)』 등에 전하며, 신라유적 위치비정 등 역사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아직도 문무왕을 장사지낸 대왕암에 대한 진위여부가 논란의 중심에 있는 가운데, 『도은집』제5권,「초옥자전」과 『동문선』제101권,「초옥자전」에는 “배를 타고서 대왕암까지 이르렀다(舟至大王嵒).]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지만, 『동문선』제51권,「초옥자전 병찬(幷贊)」에는 대왕암에 갔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동문선』 역시 1478년 초간본을 시작으로, 1482년 재인되고, 연대는 미상 또는 임진왜란 이전으로 추측되는 을해자본 번각본도 전한다. 또 1615년 서적교인도감(書籍校印都監)에서 재인되고, 1915년 고서간행회에서 번인본으로 간행되는 등 세월이 흐르면서 글의 내용에도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문무왕은 681년 사후 동해바다에 장사지냈고, 무려 680여년이나 지난 고려 말에 대왕암의 존재를 부각시킨 글이 등장하면서 그 글의 가치는 높아만 간다.

훗날 1580년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은 「동경유록(東京遊錄)」에서 “4월 18일. 신라시대 감은사(感恩寺) 터이다. … 동쪽 산 한 줄기는 곧장 바닷가로 달려와 한쪽 모퉁이에서 끊어지는데, 깎아지를 듯 서 있는 바위는 높이가 십여 길이나 되었다. 그 위에 단청(丹靑)된 누각이 우뚝 솟아 있으니, 이른바 ‘이견대(利見臺)’다. … 동헌(東軒)에 앉아 둘러보니 파도가 하늘에 닿을 듯 드넓게 넘실거렸다. 또 남쪽 포구에 바위가 뾰족뾰족 솟아 몰아치는 파도와 거센 물결 가운데 우뚝하였으니, 이른바 대왕암이다”며 이견대와 대왕암의 존재를 언급하였다. 이처럼 고전번역은 역사를 새롭게 쓰는 힘이 있다.

초옥자전 병찬(草屋子傳 幷贊)
초옥자는 계림의 사족이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공부에 힘썼으며, 19세에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 학문이 날마다 발전하여 신해(辛亥.1371)년 목은(牧隱) 선생이 고시관일 때 향시에 올랐고, 회시(會試)에 이르러 높은 성적으로 발탁되었다. 예문관(藝文館)과 춘추관(春秋館)에 들어가서 소속 관리가 되었는데, 동료들이 모두 그의 재주에 탄복하였다. 10년이 못 되어 요직을 두루 지냈고, 서해도(西海道)에 부사자(部使者)가 되어서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문하사인(門下舍人)에서 우사의(右司議)로 승진하여 장차 중요한 건의를 제출하려 했으나, 마침 다른 벼슬로 옮기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사림(士林)의 여론이 이를 애석히 여겼다. 초옥의 사람됨은 강개(慷慨)함이 빼어나고, 시(詩)를 잘 지었다. 학문이 깊고 덕행이 높은 사람과 노닐었는데, 그 가운데 경산(京山)의 도은 이숭인과 가장 친하였다.

임인(壬寅.1362)년 가을에, 도은이 경산에서 김해에 이르렀다. 김해는 수로왕의 도읍터다. 오랫동안 머뭇거리다가 황산강(黃山海:낙동강)을 건너서 드디어 계림으로 갔다. 이에 초옥은 나(도은)를 데리고 반월성을 두루 구경하며, 신라가 천 년 동안이나 오랜 역사를 누리게 된 까닭을 상상하며 함께 시를 지어 이를 슬퍼하였다. 불국사의 동쪽 봉우리에 올라서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감응사(感應寺:감은사)에서 노닐며 용혈(龍穴)을 보았다. 이견대에 오르고, 배를 타고 대왕암에 이르렀으니, 역시 동해의 기이한 경관이었다. 초옥은 항상 “대대로 선비의 법도를 따르기에, 거처는 내 몸 하나만 들어가면 될 것이니 어찌 화려하게 짓겠는가?”라며, 초가집을 짓고 살았다. 사람들 역시 그의 뜻을 높이 여겨 ‘초옥자’라 불렀다. 초옥의 성은 김씨, 이름은 진양, 자는 자정(子靜)이다.
경주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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