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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중 가장 완비된 능묘 형식을 갖춘 원성왕릉(2)
괘릉이 어떻게 원성왕릉이 되었을까?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1448호입력 : 2020년 07월 16일(목)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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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성찬 시민전문기자
원성왕은 신라 제38대왕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36대 혜공왕 때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반란을 진압하고 선덕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고 왕위를 계승한 원성왕은 재위 중 786년 당나라에 조공(朝貢)을 하고 신라왕의 책봉을 청하였으며, 788년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790년 김제(金堤) 벽골제(碧骨堤)를 증축하고 농사를 장려하였다.

또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원성왕이 즉위한 11년(795)에 당나라 사신이 서라벌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다가 돌아간 지 하루 만에 웬 여자 둘이 대궐 안뜰에 들어와 다음과 같이 호소를 하였다.

“저희들은 동쪽 못(東池), 푸른 못(靑池) 두 못에 사는 용의 아내옵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 둘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에 있는 용을 합하여 세 마리에게 술법을 써서 작은 물고기로 변하도록 하여 통에 넣어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원하옵건대 임금께서는 그 두 사람을 붙잡아 나라를 지키는 우리 남편 되는 용들을 두고 가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이에 왕이 하양관까지 그들을 뒤쫓아 가서 친히 잔치를 베풀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들은 어이하여 나의 용 세 마리를 잡아서 이곳까지 왔는가? 만약에 사실대로 털어놓지 않으면 극형에 처할 것이다”

이에 당나라 사신이 물고기 세 마리를 내어 바치므로 각각 제자리에 놓아주었더니 놓은 곳마다 물이 한길이나 솟아오르고, 용이 기뻐 뛰놀면서 물속으로 들어갔다. 당나라 사람이 왕의 똑똑하고 거룩한 바에 감복하였다.

이 이야기는 원성왕이 나라의 기틀을 새롭게 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를 나타낸 것으로 보고 있다.
왕이 죽음을 앞두고는 여러 가지 이상한 조짐이 나타났다. 왕 14년에 대궐 남쪽 누교가 화재가 발생했다고 했다. 누교는 월정교였을 것이다. 그리고 망덕사 두 개의 탑이 서로 부딪쳤다. 그해 12월 왕이 죽어 봉덕사 남쪽에 화장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화장 후 산골했다는 기록이 없으니 능묘를 조성했으리라.

원성왕릉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번지로 왕경의 동남쪽 통일신라시대 오악 가운데 동악으로 숭배하던 토함산 남서쪽 자락에 있다. 산 아래쪽의 낮고 평평한 구릉지에 있는데 경주 시내에서 약 12㎞ 떨어져 있다.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 가운데 안강에 있는 흥덕왕릉을 제외하면 경주 중심부에서 가장 먼 거리에 축조된 왕릉이다.

사적 제26호로 지정된 원성왕릉은 신라 능묘로서 가장 완비된 형태의 석물(石物)을 갖추고 있을 뿐더러, 그 조각 또한 뛰어나 이후 신라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와 조선이 왕릉을 조성할 때 본보기가 된 능이다.

이 원성왕릉을 괘릉(掛陵)이라고 했는데 피장자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경주 지역 역사지리서인 『동경잡기』 「능묘」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괘릉은 부의 동쪽 35리에 있는데, 어느 왕의 능인지 알 수 없으나,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수중에 장사지낼 때 돌 위에 널을 걸어 흙을 덮은 까닭에 걸 괘(掛)자 괘릉이라 이름하였다. 석물(石物)이 아직 남아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수장한 임금이라면 문무왕이라 생각하여 이를 조선 후기 이후 한동안 문무왕릉이라고 했다. 1712년경 경주부윤 권이진은 괘릉이 원성왕일 것이라고 추정한 바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5년 정인보 역시 괘릉의 문무왕 설을 부정하였다. 그 후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기록과 1960년대 삼산오악 조사단의 조사 결과 양북면 봉길리 앞 바다에 있는 대왕암이 문무왕을 장사지낸 곳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고, 이후 최치원의 문집에서 추려낸 4개의 비문 즉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에 숭복사비의 비문에 의해 이 능이 원성왕릉임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원성왕릉을 쭉 둘러보니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의 무덤과 대비된다.

프랑코는 죽은 뒤 반듯하게 눕혀서 묻지를 아니하고 엎어서 얼굴이 땅을 향하도록 묻었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 위에다 5톤 무게의 큰 돌로 짓눌러 놓았다고 한다. 그 돌 위에 대리석 한 장이 묘비처럼 놓여 있는데 그 위에는 그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이름 두 자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프랑코와는 달리 내정은 물론 외치에서도 선정을 베풀었기에 원성왕릉을 이렇게 완벽하게 조성하였으리라.

*혜공왕 16년(780) 이찬 김지정이 모반하여 도당을 모아 궁궐을 포위하였을 때 상대등 김양상이 이찬 김경신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김지정 등을 베어 죽였다. 혜공왕이 난병에게 피살되고 김양상이 왕위에 올랐으니 제37대 선덕왕이다. 선덕왕이 죽은 후 김경신이 왕위에 오르니 제38대 원성왕이다.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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