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의 신도비명을 지은 경주부윤 황경원
경주신문 기자 / 1453호 입력 : 2020년 08월 27일(목)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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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 김해 김수로왕의 12대손 김유신(金庾信,595~673)은 신라 삼국통일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명장으로, 금관국왕 증조부 구해(仇亥)에 이르러 신라에 투항하였고, 김무력(金武力) – 김서현(金舒玄) - 김유신으로 장수의 계보가 이어진다. 부친 김서현과 모친 김만명(金萬明:진흥왕의 사촌인 숙흘종의 따님)사이에서 빼어난 장수로 성장한 김유신은 무열왕의 셋째 공주 지소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해 아들 5명을 낳았다. 장남 김삼광(金三光)은 천자가 불러서 중랑장(中郞將)을 삼았고, 차남 김원술(金元述), 다음은 김원정(金元貞), 다음은 김장이(金長耳), 다음은 김원망(金元望) 그리고 서자 군승(軍勝)을 두었다.
송화산 자락에 위치한 김유신장군묘 일대는 봄철 벚꽃 구경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매표소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1933년 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1893~1950)가 지은 ‘신라 태대각간 순충장열 흥무대왕 김유신 신도비(新羅 太大角干 純忠壯烈 興武大王 金庾信 神道碑)’가 보이고, 흥무문(興武門)을 지나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잘 정비된 김유신장군 묘역이 나온다.
묘의 동편에는 1934년 후손이 세운 ‘흥무왕릉’ 비석과 서편에는 1710년 경주부윤 남지훈(南至熏)이 세운 ‘김유신묘’ 비석이 역사를 전하고, 아래에는 1992년 숭무전(崇武殿)을 세워 위패를 모셨다. 부윤 남지훈은 『동경지(東京誌)』를 증보하여 『동경잡기(東京雜記)』를 간행하는 등 경주지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임하필기(林下筆記)』제34권,「화동옥삼편(華東玉糝編)」·「동경의 고적에 대한 고찰」을 보면, “각간 김유신의 묘비는 경주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1724~1802)가 그 묘에 제사를 지내고 비를 찾아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20년 후에 서예가 이서구(李書九,1754~1825)가 금석첩(金石帖) 속에서 김 각간의 비문 몇 폭을 발견하였는데, 감정해 보니 김 각간의 비문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아마 임진왜란 때 비가 없어진 모양인데, 이 탁본은 임진왜란 전의 옛 탁본으로서 구양순(歐陽詢:歐陽率更)의 필법과 비슷하다. 동방의 고적으로서는 이 비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이 비가 만일 중국에 있었더라면 구루문(岣嶁文)이나 석고문(石鼓文)의 다음은 되었을 것이다.”하고,『이계집』권16,「제김각간묘비(題金角干墓碑)」에 그 내용이 상세히 들어있다. 전하는 말에 신라 때 국자박사 설인선(薛因宣)에게 명하여 김유신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을 세웠다고 하지만 전하지 않는다.
이에 강한(江漢) 황경원(黃景源,1709~1787)은 고려 때 문하시중 김부식(金富軾)이 공의 열전을 썼으나,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 많아서 진실을 고찰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겼고, 김유신이 임금을 잘 만난 것과 무열왕이 김유신을 신임한 사실 등 역사의 사실을 재기록하였다.
황경원은 경주의 여러 문인들 글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경주부윤(재임1751.08~1752.08)을 지냈고,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의 문인으로, 서인계 노론이자 영조년간 손꼽히는 문장가였다.
당 고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 식읍 2천호 신라국 상장군 김공의 신도비명 서문을 아우르다 〔唐故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新羅國上將軍金公神道碑銘 幷序〕
내(황경원)가 경주부윤이 된 이듬해 1752년 3월에 그곳의 장로 류의건(柳宜健) 등이 와서 “유당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 식읍 2천호 신라국 상장군(有唐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新羅國上將軍) 김공(金公)의 무덤이 서악(西嶽) 언덕에 있는데, 예전에는 당나라 함형(咸亨) 년간 묘도(墓道)에 세운 큰 비(碑)가 있었지만, 돌에 새긴 것이 해가 오래되어 떨어져 나가고 망가져서 그 공덕을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사민(士民)들이 각기 재물을 내어 다시 돌을 세우고 당세의 문장가를 얻어 그 명(銘)을 지으려고 하니, 지금 선생께서 경주부윤으로 오셨으니 저희들이 감히 청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살펴보니, 김유신은 기계(杞谿) 사람으로, 증조부 김구해(金仇亥)는 금관국(金官國)의 왕이었고, 조부 김무력(金武力)은 신주 총관(新州總管)으로 백제의 왕과 그 장수들을 잡고, 만여명을 참수하였으며, 아버지 김서현(金舒玄)은 양주 도독 안무양주제군사(梁州都督安撫梁州諸軍事)를 지냈다. 공은 17세에 백제와 고구려가 번갈아 가며 영토를 침공하는 것을 보고 개연히 두 나라를 평정할 뜻을 품었다. … 김유신이 병으로 앓아눕자 왕이 문병을 와서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경의 병을 피할 수 없다면 사직을 어찌하겠는가?”라 하니, 김유신은 “신은 어리석고 불초하나 전하께서 저를 써주시고 의심치 않으신 덕분으로 작은 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금 삼국이 이미 한집이 되었으니 다소 편안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자고로 보위를 이어받은 임금은 끝을 잘 마무리한 경우가 드무니, 전하께서는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하여 왕업을 무궁토록 전하게 하신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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