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함께 떠난 과거시험장의 기록「서정기」
경주신문 기자 / 1463호 입력 : 2020년 11월 12일(목) 15:12
공유 :   
|
 |
 |
|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 묵헌(黙軒) 이태수(李泰壽,1799~1857)는 회재선생의 혈손인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1516~1568)의 직계 후손으로, 1799년 옥산 독락당에서 부친 이진연(李眞淵,1778~1820)과 모친 월성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잠계공의 아들 구암(求庵) 이준(李浚,1540~1623) … 이홍후(李弘煦)-이익규(李益圭)-이수담(李壽聃)-이의식(李宜植)-이희성(李希誠)-조부 이립(李岦,1740~1805)의 가계를 이루며, 평소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뛰어났다. 인동장씨 장억주(張億籌)의 따님과 혼인해 성재(省齋) 이기원(李紀元,1830~1879)·이기서(李紀瑞,1841~1906) 등 2남 2녀를 낳았다. 지난해 『안강문화연구회』「비화원」19호에 게재된 ‘黙軒 李泰壽의 「南遊日記」 考察’을 통해 조선후기 경주문인의 유기문학 연구와 감포의 용굴[공암(孔巖)]에 대한 기록 등을 소개한 적이 있다.
회재는 24세이던 1514년(중종9) 별시에 응시하러 가면서 「서정시(西征詩)」를 남겼고, 당시 과거에 합격해 권지 교서관 부정자(權知校書館副正字)가 되었다. 1851년 53세의 묵헌 역시 22세의 아들 이기원과 함께 봄날 2월 20일 집을 출발해 3월 15일까지 한양에 도착하는 26일간 740리 여정의 「서정기(西征記)」기록을 남겼으며, 유람 중에 지인을 만난 것과 과거시험장에 대한 내용 등을 중심으로 일정별 서술을 하였다. 본 연구는 「비화원」20호에 ‘黙軒 李泰壽의 「西征記」 考察’로 게재될 예정이다.
묵헌의 「서정기」는 유람의 날짜·날씨·이동장소와 만난 인물들 그리고 이동거리 등 일기형식의 기록 구성을 갖는다. 조선후기 다양한 글쓰기 방식이 향유된 유기문학의 흐름으로 보더라도 매우 축약되었으며, 긴 여정의 글을 일정별로 나누고, 일정별 서술과 감상기행문의 장점만을 취해 유록을 기술하였다. 이는 조선후기 유기에서 드러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글쓰기 양식으로, 묵헌 역시 다양한 유기문학을 접하고, 자신만의 축약되고 응축된 글로 승화시켰다.
묵헌은 집에서 영천을 지나 구미, 김천, 충북 영동 황간, 충남 대전, 충남 천안, 경기도 수원, 평택 등을 거쳐 한양에 도착하는 총 296km 이상의 장거리 유람을 하였다. 오랜 여정에서 달성평의 딸과 사위를 만났고, 아들과 과거시험장을 둘러보고, 지방에서는 보기 힘든 임금의 능행(陵行)을 보았다. 때로는 옛 경주부윤을 만나 고마움을 표하고, 지인을 만나 회포를 풀었다. 그저 평범한 유람으로 보이지만, 정작 유람 이후 아들 이기원은 훗날 44세 되던 1873년(고종10)에 식년시(式年試) 성균관 진사에 올랐고, 평소 묵헌 자신이 못다 이룬 학문의 뜻을 아들이 일으켰다.
묵헌과 아들 이기원의 머나먼 동행은 유람을 통해 선대의 가업을 잇고, 학문의 뜻을 품는 기회의 유람이었다. 이렇듯 다양한 유람배경을 갖춘 유록은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서정기」 - 이태수 2월 20일. 아들 이기원(李紀元)과 함께 이불점(二佛店)에서 점심을 먹었다. 30리를 걸었다. 배병천(排兵川)에서 묵었다. 40리를 걸었다. 이날 70리를 걸었다.
2월 21일. 날씨 흐림. 신녕현(新寧縣)에서 점심을 먹었다. 30리를 걸었다. 의흥(義興:군위) 신현점(新峴店)에 도착하였다. 30리를 걸었다. 비를 만나 흠뻑 젖었고, 해 질 무렵 달성평(達城坪) 딸네 집에 도착하였다. 20리를 걸었다. 이날 70리를 걸었다. 여러 날을 묵었다.
2월 25일. 맑음. 아들 이기원이 발에 병이 나서 잠시 선산 구미시장에서 쉬었다. 30리를 걸었다. 겨우 조금씩 개령(開寧:김천) 마암(馬巖) 밖으로 가서 묵었다. 20리를 걸었다.
3월 1일. 용전(龍田) 송 집의(執義) 댁에 도착하였다. 먼저 참봉 3형제에게 가서 주변에서 술을 주고받은 후에 들어가 장석(丈席:학문과 덕망이 높은 사람)을 뵈었다. 보살피고 사랑하는 법도가 더욱 예년보다 배가 되었다. 그때는 전라도 광주인 박정휴(朴鼎休) 집에서 묵었는데, 하룻밤을 더 묵었고, 아침마다 음식을 대접받았으며, 본댁(아내)도 그러하였다.
3월 6일. 이른 아침을 먹고 옹봉(甕峰)에서 수업하였다. 15리를 갔다. 사근평(肆覲坪)에서 점심을 먹었다. 15리를 갔다. 과천읍(果川邑)에서 묵었다. 40리를 갔다. 이날 70리를 갔다.
3월 9일. 미동(美洞) 참판 윤치겸(尹致謙) 댁을 방문하였고, 들어가 뵈었는데 깊은 마음의 태도가 예년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한성부윤에 재직하였다.
3월 10일. 삼일제(三日製)를 설장(設場)하였기에 관광(觀光)하였다. 시제(試題)는 ‘天下利之而勿德是謂大仁’이다. 이날 50명을 먼저 뽑았는데, 3명이 초시(初試)에 붙었고, 47명은 상격(賞格)에 붙었다.
3월 13일. 정시(庭試)를 베풀다. 시제는(試題)는 ‘至于文武纘太王之緖’이다. 이날 처음 뽑힌 급제자가 5명이었다.
3월 15일. 임금께서 파주 능행(陵行)하는 위엄의 장관을 보고, 한강을 건너 돌아왔다.
|
|
경주신문 기자 - Copyrights ⓒ경주방송.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최신이슈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최신뉴스
|
|
|